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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이팟터치가 하나 생겼다. 우연찮게 생긴 것인데 손이 꽤 간다. 재미있기도하고, 작은 것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어쨌거나 아이폰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문자를 무료로 쓸수 있는 앱이 있어 소개한다.

문자마루라는 앱이고, 링크는 [문자마루] 를 클릭해서 따라가면 된다.

자세한 설명은 거기서 보고, 중요한 것은 이게 무료라는 것과 무료기때문에 광고를 봐야하는데, 그 광고가 따로 문자를 보낼때마다 클릭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마루에서 문자를 보내는 배경화면에 있다는 정도다. 그래서 배경화면은 광고가 들어차 있지만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이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문자를 보낼 수 있다는 게 어디냐하는 마음에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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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듀라항 2010/03/17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미칠듯한 어플입니다
    처음에 주어지는 문자가 82건인가 되고 매일매일 몇건씩 올라가네요
    이런어플 처음입니다 ㅡ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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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명 중에 첫째 (2010-03-B)

(막 12:28-34)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 우선순위의 문제로 고민함

서기관 중 한 사람의 관심은 분명했다. 그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관해서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율법사들이 예수께 와서 비난할 꺼리를 찾기 위해 논쟁을 했던 반면 이 한 사람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정직하게 가지고 와서 그것을 묻는다.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간다. 많은 정치인들에게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동기나 하고픈 소망은 정당에 소속되는 순간 사라진다. 한 정치인의 색깔은 그가 품고 있는 이상이나 하고픈 열정에 있지 않다. 정치인의 색깔은 그가 속한 정당에 의해 결정된다. 기업에 들어가기 전 사람들은 그 기업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업에 들어가는 순간 많은 이들은 그 입에서 더 이상 건설적인 비판조차도 나오지 못한다.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르고 거기에 불순응 할 경우 발생될 불이익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앞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교회라는 실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서서히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너도 아무말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서로에게 행사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이런 교회의 모습이 정말 부패한 로마카톨릭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노력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의 모습인가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때때로 그 역겨움에 코를 틀어막게도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전을 크게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일까? 때로는 그 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더 좋은 신앙교육을 위해서, 더 많은 이들과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는 더 큰 건축물과 넓은 장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크게, 더 화려하게 건물을 높이는 것,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겠다는 마음이 주가 되고, 그것을 교회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돌볼 수 없을 정도의 대형교회가 더 큰 교회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교회는 점차 기업의 모양을 닮아간다. 그리고 더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미 기업들이 버리기로 결정한 그 초대형 공룡의 몸집이 좋다고 닮아가려고 한다.


2. 무엇이 첫째인가?

다시 서기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서기관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 마음속에 담긴 질문을 예수께 가지고 왔다. 당시 서기관들 사이에서 율법에 있는 ‘하라’는 명령 248가지와 ‘하지 말라’는 명령 365가지, 총 613가지 조항 중 더 중하고 큰 것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서기관은 그 중 우선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서기관의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예수의 대답은 모든 계명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613가지의 조항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싶어 했다.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 그중 더 중요한 것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반면 예수는 그 질문에 대해 모든 율법의 근원적인 정신에 대해 말한다. 율법 중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대신, 모든 율법의 근원적인 정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이 다를 때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그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갇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통합시키지 못한다. 왜 그리스도인은 기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고통받는가? 욥의 고통과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잃고서 여전히 여호와 때문에 기뻐한다는 선지자 하박국의 찬양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슬프거나 혹은 기뻐한다. 슬프면서 동시에 기쁠 수 없는 그런 한계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예수는 이 모든 것이 통합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내려왔다. 그러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이 통합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갈 하나님의 나라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나라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그 마음에 세상의 고통을 보며 슬퍼함이 있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그 두 가지가 충돌되지 않고 하나로 잘 통합된 그런 세상, 그것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세상의 질서 속에서 가지고 있는 율법 중 첫 번째 것을 묻는 서기관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예수의 대답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듯 해보이지만, 질문에서 물었던 것은 하나였기에 이 둘의 우선순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시하거나 월등히 탁월한 명령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비중을 가지고 실천해야 하는 율법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율법조항을 원하는 질문에 모든 율법이 통합된 대답이 주어졌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왔고, 그 완성은 오늘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은 두 개의 대답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


3. 그의 문제는 무엇이며,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큰 오류를 범한다. 타인의 문제를 아는 듯 쉽게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지진으로 딸을 잃은 한 여인의 통곡하는 절규를 본 적이 있다. 아이티의 지진으로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하늘을 원망했다. 하나님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을 반복하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말한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리 스트로벨의 책을 보면 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모습이 나온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증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면서 인간 사회의 수많은 고통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고통중에 내버려 두시는가? 왜 악인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게 두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에 빠져 여러 신학자들을 만나며 그 대답을 듣던 중에 이웃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이웃집에 사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자신이 예전에 실수로 자기 딸 아이를 차에 치어 죽게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주차하는 것을 보아주고 있었고, 차를 후진하던 중 거기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딸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는 차에 치였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부부는 큰 충격에 쌓였다. 도저히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부부는 오히려 그 슬픔과 고통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정작 문제에 빠진 이들을 보며 그들이 그 문제를 이겨낼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정작 고통을 당했던 많은 이들이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의 고통을 이유로 들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회피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며, 그러한 제자를 보며 이런 말은 한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2010.3. GBS 2 단상 - 모든 계명 중에 첫째 (2010-03-B)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201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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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막 11:12-25)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1. 무화과나무와 성전

무화과나무는 목마르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무화과는 잎과 열매가 동시에 생긴다. 다른 무화과나무들이 열매를 맺기 이전에 조금 더 빨리 열매를 맺는 무화과가 있다. 그 역시 잎이 생기면서 동시에 열매가 맺히는 무화과나무다. 그 잎을 보고 열매가 맺혀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성전은 모든 사람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거기엔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이방인의 뜰에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 예배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한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였고, 그것을 위해 성전은 존재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성전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는 대신에 온갖 장사꾼들과 모리배들의 역겨운 독과점이 형성되고 있었다.


2. 성전에서 있던 일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성전제사를 위해 모인다. 그들은 제사를 위한 제물을 가져왔다. 혹 멀리서 오기 때문에 제물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성전에 제물을 판매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이 매매행위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리는 이방인들을 위한 예배 대신 장사꾼들의 매장이 되어갔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은 결탁하기 시작했고 일반인들이 가져오는 제물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제사 제물로 적합하지 않다는 심사를 내리고 그곳에서 제물을 사도록 유도했다. 거기서 판매되는 제물들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판매되는 제물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식으로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성전의 이방인의 뜰이 협잡꾼들에 의해 지저분한 뒷거래 블랙마켓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강도의 소굴, 그것이 그곳을 본 예수의 지적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상과 의자를 뒤집어 엎으셨다. 화를 내신 것이다. 분노하신 것이다. 무화과를 향해서는 말로 그 책임을 물었다면 이제 성전에 있는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직접 그 분노를 몸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3. 아아, 한국 교회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거룩한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했다. 만민이 와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은혜에 취해야 할 교회가 세상의 복을 갈구하는 자본의 노예들에 의해 점령되어 그것이 복음인양 선포되고 있다. 더 큰 교회를 지향하는 대형교회들의 모습, 더 열심히 기도하면 자녀들이 더 좋은 대학에 갈 것이라는 설교, 더 열심히 기도하면 복을 받을것이라는 말과 구원은 아무나 받지만 축복은 아무나 받지 못한다는 허튼 소리가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들 중 이런 형편없는 잡소리에 노출된 교회가 얼마나 될까?

바알은 맘몬에 빠진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우상이다. 맘몬은 물신을 의미한다. 맘몬은 자본을 신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것이 행복이고, 그것이 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맘몬의 갈망은 더욱 강해진다.

(렘 7:8-11) 8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 종교지도자들은 분명히 열심히 제사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는 그들이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열심히 제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맘몬을 향한, 바알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엎드리는 장소는 여호와의 전이었지만 엎드리는 상대는 바알이었다.


4. 산이 들리워 바다에 던져지는 기도

보통 이 기도에 대한 설교는 개인적 적용의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즉, 한 개인이 이루기 힘든 소위 성공이라고 불리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학도 가고, 얼마든지 좋은 직장도 가지고, 얼마든지 사업이 번창하고, 얼마든지 좋은 배우자도 얻는 그런 식이다. 그건 산이 들리는 기도가 아니다. 그저 성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거기 와서 예배해야 할 사람을 방해하면서 시커먼 뱃속을 채우려는 성전 장사꾼들과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산이 들리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다.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바를 간절함을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간절한 기도일 수는 있어도 믿음의 기도는 아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속에 있는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주가 되어야 한다. 내 힘으로는, 내 지식으로는, 내 경험으로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어떤 것,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그 일, 거기에 믿음이 생긴다.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 거기엔 그 일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방해해도 결국은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기도요, 그것이 진정한 산을 옮기는 기도인 것이다. 산을 옮기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다. 하나님이 산을 옮기고자 하신다면 언제든지 그 산은 그 자리에서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아니 애초에 거기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말것이다.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있다. 그 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에 빠지듯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더 이상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뜨거운 열심을 보였다. 세상에 대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는 많지 않았지만 그중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온전한 열정이 아닌 맘몬을 경배하는 교회는 그 큰 몸통을 자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산은 바다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지만 산이 가로 막고 있는가? 그 산은 치워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결국은 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 애초에 산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시원스러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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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1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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